[스크랩] 마음에 관련하여 / 오쇼
[다시 올리는 글]
마음에 관련하여:
질문:
스승께서는 항상 “마음을 내려 놓으라, 마음을 침묵케 하라, 진리를 구하는 데 마음은 필요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정녕 마음은 악동의 역할만 하는 것일까요?
답변:
마음은 가장 의미 있는 것이다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하인으로서 의미 있는 것이다.
마음이 그대의 주인이 되면 바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마음은 그대의 가슴 자리를 빼앗고 그대의 전 존재를 휘어잡는다.
그러면 마음은 그대의 지시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그대에게 지시를 내린다.
마음은 없애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존재계에서 가장 진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한다.
“하인이 주인 되는 것을 경계하라.”
그대의 존재가 첫째요,
그대의 가슴은 둘째이며
그대의 먀음은 셋째이다.
이것이 참으로 균형잡힌 인간의 모습이다.
이를 명심하라.
논리의 세계에서 마음은 더없이 중요하다.
마음이 없으면 사회에서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에서는 마음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대가 마음을 이용해야지 마음이 그대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이용하는 것과 마음에게 이용을 당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우리가 과학을 발전시키고 기술을 개발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마음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 마음이 지나치게 강력해진 나머지, 인간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든다.
인간의 온갖 해악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마음이 가슴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것이다.
가슴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가슴은 장미꽃과 같은 것이다.
마음은 그대에게 양식을 줄 수는 있으나 기쁨을 주지 못한다.
생명의 기쁨을 ,주지 못한다.
마음은 매우 심각하다.
그래서 마음은 웃음을 앗아간다.
웃음이 없는 삶이란 인간 이하의 삶이다.
온 존재계에서 웃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그러므로 웃음이 없는 삶은 비인간적이다.
인간이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깨어난 존재요 가장 높이 진화한 존재임을 뜻한다.
동물도 웃지 못하고 나무도 웃지 못한다.
마음이란 새장에 갇힌 사람들?성자와 과학자,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웃지 못한다.
그들은 너무 심각하다.
심각은 병이다.
심각함은 영혼의 암이다.
대단히 파괴적이다.
인간이 마음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기 때문에
창조적인 에너지는 모두 파괴를 하는 데 허비된다.
한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핵무기를 양산한다.
한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지만 다른 한족에서는 달을 정복하려고 한다.
마음에는 아무런 사랑이 없다.
사랑과 기쁨, 웃음을 위해......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마음에서 해방된 가슴이 필요하다.
가슴은 고귀하다.
시장에서는 가슴이 쓸모없다.
시장은 신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에는 생명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은 가장 저급한 인간 세계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는 예수의 말은 옳다.
하지만 마음은 그대에게 빵만을 줄 뿐이다.
그대는 빵으로 생존할 수 있지만 생존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삶에는 빵 이외에도 춤과 노래와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있어야 할 자리에 놓아야 한다.
마음과 가슴 사이에서 갈등이 있을 때는 먼저 가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랑과 논리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면 사랑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논리는 그대에게 생명의 과즙을 주지 못한다.
논리는 메말라 있다. 논리는 계산을 하는 데 유용하다.
수학과 과학, 기술 등에 유용하다.
하지만 논리는 인간관계에 유용하지 않다.
그대의 가능성을 꽃피우는 데 유용하지 않다.
가슴 다음에 존재가 온다.
마음이 논리요 가슴이 사랑이라면 존재는 명상이다.
존재는 그대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대 자신을 앎으로써 존재계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다.
존재를 아는 것은 어두운 내면세계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내면의 빛이 개어나지 않으면 외면의 빛은 쓸모 없는 것이 된다.
그대의 내면은 어두운 심연이요 어두운 무의식이다.
그대의 모든 행위는 이 눈먼 어둠 속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에 반대하는 말을 할 때 부디 오해하지 말라.
사실 나는 마음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대가 마음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가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되기를 바란다.
교향악을 연주할 줄 모르면, 통합을 할 줄 모르면,
일들을 밝게 볼 줄 모르면 똑 같은 악기들이 소음의 지옥을 만든다.
존재가 그대의 궁극이 되어야 한다.
존재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대 내면의 존재는 신의 부분이다.
존재는 마음도, 가슴도 줄 수 없는 것을 그대에게 준다.
이 존재에서 침묵이 나온다.
존재에서 평화가 나온다.
존재에서 진실함이 나온다.
존재에서 지복이 나온다.
그리고 존재에서 불사(不死eternal life)가 태어난다.
존재를 알면 죽음은 환영이 되고 생명이 영원으로 비상을 한다.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기껏해 보아야 일잘하는 로봇에 불과하다.
명상으로 그대의 존재를 찾아라.
그대의 진여(眞如)를 찾아라.
그런 다음 가슴과 사랑으로 존재에서 퍼져나오는 지복을 나누라.
그대의 지복을 나누는 것,
그대의 기쁨을 나누는 것,
그대의 춤을 나누고 희열을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은 시장에서 훌륭하게 일을 한다.
하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는 마음의 재잘거림을 멈추게 하라.
그대의 외투나 신발, 모자를 벗는 것처럼 마음에게 이렇게 말하라.
“그만 재잘거림을 멈추라. 이곳은 너의 세계가 아니다.”
이는 마음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휴식을 주는 것이다.
가정에서 아내나 남편, 아이들, 부모, 친구들과 있을 때는 마음이 필요없다.
이때는 흘러넘치는 가슴이 필요하다.
가정에 사랑이 흘러넘치지 않는다면 그곳을 가정이라 부르지 말라.
그런 곳은 집일 뿐이다.
그대의 가정에서 명상의 순간을 체험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존재를 체험할 수 있을 때 이 가정은 신전으로 승화된다.
똑 같은 집이라해도......마음에게는 그냥 집일 뿐이요 가슴에게는 가정이되며 존재에게는 신전이 된다.
집은 거기 그대로 있지만, 그대는 변화한다.
그대의 비전이 변하고 그대의 차원이 변하며 그대의 이해가 변하고 사물을 보는 눈이 변한다.
이 세 가지가 없는 집은 빈곤한 집이다.
마음과 가슴과 존재가 조화롭게 통합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우주 모든 곳에 퍼져 있는 지혜에 속한 존재, 사람들은 이를 신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를 신성(神性)이라 부른다.
이 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쇼 인생>에서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 3 in C minor, Op. 37 (I ~ 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