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하는 방/내 생각을 섞다

[스크랩]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웃는날 2012. 2. 27. 18:33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2009년 8월 10일 장용창 드림.

yongchangjang@hotmail.com

 

 

1. 알림

 

이 글의 내용은 요가의 가르침과 비슷합니다. 이 글의 내용은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s)과 바이런 케이티, 그리고 에카르트 톨레가 하는 말하고도 비슷합니다. 이 글의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하고도 비슷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 글을 쓰는 이유

 

모임에서 제가 마음 편히 지내는 방법들을 말씀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 분들은 제 말씀조차도 불편하게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께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세계관, 혹은 나 자신에 대한 관점이 바뀌면 평화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3.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사람은 육체, 마음(생각, 에고), 하느님, 사회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중에 “나는 하느님이다”라는 것만 영원한 진리이고 나머지 셋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을 두고 저 세 가지 거짓말에 속고 삽니다. 그래서 “이 몸이 나야, 이 생각이 나야, 또는 나는 누구의 누구야”라고 생각합니다. 이 거짓말에서 벗어나 “나는 하느님이야”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하는 것, 그게 깨달음입니다. 간단하죠?

 

4. 하느님은 누구인가?

 

3에서 “나는 하느님이야”라는 것만이 영원한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럼, 당연히 따라 오는 질문은 그럼 하느님은 누구인가가 됩니다. 하느님은 현실 그 자체입니다. 우주 그 자체입니다. 사실 그 자체입니다.

 

기독교에선 하느님의 속성으로 영원불멸, 전지전능을 말하는데, 이건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영원불멸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현실이야말로 모든 진리의 근원이기 때문에 현실만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그 누구도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고, 현실만이 최종적인 승리자이기 때문에 현실이야말로 전능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영원불멸하고 전지전능합니다.

 

요가에서는 하느님의 속성을 Sat Chit Ananda라고 가르치는데, 사트는 진리, 치트는 의식, 아난다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요, 그 진리를 의식하는 의식이며, 그 진리를 의식하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하느님이야”에 적용하면 나라는 존재는 진리 그 자체이며, 그 진리를 아는 의식이며, 영원한 기쁨의 화신이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진리요 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헤겔이 현실이야말로 신의 현현이라고 말한 이유도 이것입니다.

 

5. 깨달음의 수단: 불편한 감정에 대한 연구

 

불편한 감정들을 공부하는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불편한 감정이 생길 때마다 “아싸! 신난다”라고 외치면 됩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감정의 근원은 “하느님인 나”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에고(생각, 욕망)”입니다. 하느님의 속성이 영원불멸, 전지전능, 기쁨인 데 반해, 에고의 영원한 속성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 자기자신만 보호, 두려움, 뭐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에고라는 이 귀여운 친구가 활동을 할 때마다 우리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불편한 감정이 생길 땐, 그냥 “어 또 이 에고라는 친구가 발작하는구만”이라고 말하면서 느긋하게 구경이나 하고 있으면 됩니다. , 행동은 다릅니다. 우리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고의 명령을 따를지 하느님의 명령을 따를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 깨어 있는 사람은 에고의 발작을 그냥 구경만 하고, 행동할 때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6. 내 안의 하느님과 현실

 

나는 하느님이라는 말과 하느님은 현실, 혹은 세상이라는 말은 모순이 아닐까요? 요가에서는 바다 위의 파도, 혹은 병 안에 든 공기 등으로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바다 위의 파도도 바다의 일부인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도 전체 하느님, 현실의 일부입니다. 병 속에 든 공기도 병이 깨어지면 병 밖으로 나가서 밖에 있는 전체 공기와 합쳐지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도 전체 하느님과 똑같은 존재입니다.

 

7. 첫번째 착각-

 

위에서 세 가지 착각을 말씀 드렸는데,  인도에선 이런 착각을 아비댜(Avidya)라고 부릅니다. 비디야(Vidya)는 지식, 지혜라는 뜻인데, 여기에 부정형 접두어 A를 붙여서 Avidya가 되면 무지, 착각, 환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요가에서는 인간 고통의 첫번째 원인이 바로 착각(avidya)이라고 하는데,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과 똑같은 얘기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임을 잊어버리고, , 생각, 혹은 관계가 나라고 착각할 때 바로 고통이 온다는 것입니다.

 

내 몸이 나인가요? 키가 작아서, 뚱뚱해서, 못 생겨서 괴로우신가요? 정말로? 몸은 고통의 원인이 아닙니다. 고통의 원인은 “나는 키가 커야 해, 나는 예뻐야 해, 나는 날씬해야 해”라는 생각이고, 이 생각은 바로 에고의 발작입니다. 심지어 “나는 건강해야 해”라는 생각도 에고의 발작이라서, 이런 생각도 고통을 줍니다.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 마치 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서 했던 말처럼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뚱뚱하지만 오케이, 못생겨도 괜찮아”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뚱뚱하지만 왜 괜찮을까요? 이 몸은 우리(하느님)가 입고 있는 옷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해 드디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을 때 신발을 벗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습니다. 남들이 신발 벗은 저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지만,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좋은 신발을 신든, 나쁜 신발을 신든, 혹은 신발을 벗은 경우에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이 건강하건 말건, 키가 크건 말건,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몸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8. 두번째 착각-생각(에고)

 

두번째 착각은 나의 생각을 나라고 믿는 것입니다. 두번째 착각은 세 가지 착각의 근원입니다. 착각은 에고의 속성이고, 내가 지금 착각하고 있다는 것은 에고가 발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에고는 지 맘대로입니다. 어제는 하늘이 파랗다고 생각하다가 오늘은 하늘이 희뿌옇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한번 일관되게 진실된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우리의 생각을 에고에게만 맡겨 버릴 때, 우리는 언제나, 사실과는 무관하게,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믿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믿는 것이 사실과 달라질 때 바로 고통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바로 에고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이 에고의 발작임을 이해하는 순간, , 깨달음을 얻는 순간, 고통은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요가에선 생각을 원숭이에 비유합니다. 그것도 엉덩이에 불붙은 원숭이에 비유합니다. 이 놈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시로 날뛰기 때문입니다. 이 놈을 조용히 만드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가능한 것은, 그냥 이 놈이 노는 꼴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 이 놈 시키는 대로 따라 하지 마시고,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말이죠. 요가에서 하느님의 속성을 의식(awareness)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원숭이(생각)을 구경(의식)하는 존재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9. 세번째 착각-사회적 관계

 

제가 처음으로 제 요가 선생님을 만났을 때,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입니다.” 이건 고등학교 윤리 책에 나오는 정답입니다. 나라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고, 제 부모님의 아들이고, 누구의 남편이고, 누구의 친구이고, 어느 학교 졸업생이고, 어느 회사 직원입니다. 나라는 사람은 이런 사회적 관계를 모두 모아 놓은 집합체라는 것이지요. 그랬더니 요가 선생님이 또 묻습니다. “너라는 사람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면, 그 사회적 관계들이 모두 사라지면 너도 사라지는 거냐?" “예?” 착각이 고통이 원인인데, 지식을 가르친다는 우리들의 교과서는 고통을 일으키는 착각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윤리 책 너머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자녀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부모이기 이전에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남편, 아내이기 이전에 하느님 자신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우리가 우리라고 믿고 있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너를 잃으니 마치 내 신체 일부를 잃은 것처럼 고통스럽구나”라고 어느 영화에 나올 때, 우리는 정말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의리를 알고, 관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도덕을 아는 사람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관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너를 잃었지만, 나는 하나도 잃은 게 없구나”라고 깨달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깨달은 사람들이 매우 부도덕한 사람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착각입니다. 저는 부부들에게, “서로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릴 때 둘 사이에 진정한 평화와 사랑이 싹틉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너의 남편이니까 니가 나한테 잘해줘야 해, 나만 사랑해줘야 해”라고 말한다면, 매우 로맨틱해보이지만, 천만에 말씀, 그것은 불행과 고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부부가 진정 사랑의 관계를 맺고 싶다면, 부부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본질이 하느님이며, 상대방도 하느님이며, 서로 해야 할 일은 아무 기대 없이 서로 아껴 주는 것밖에 없음을 깨달으면 됩니다.

 

인간 관계가 잘 안 풀려서 힘들 때마다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아싸, 신난다.” 왜냐하면, 그때야말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즉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10. 깨달음과 초능력

 

어떤 사람들은 깨달음이 초능력을 얻는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나 부처님처럼 기적을 행할 수 있어야 깨달은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를 믿으십시요. 깨달음은 초능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초능력, 그러니까 자연의 법칙을 이길 수 있는 능력들을 인도 말로 싯디(Siddhi)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 요가의 교과서인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에 나와 있습니다. 요가의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자연스럽게 이런 초능력을 얻게 된답니다. 하지만 요가수트라에는 초능력이 오히려 깨달음을 방해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초능력을 절제하지 못하고 마구 써 버리면 거기서 더 이상의 요가적 성취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가를 한다고 하면 공중부양을 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기를 느낄 수 있고, 남의 전생도 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 제발, 착각에서 벗어 나십시요. 하느님은 현실 그 자체이므로 바로 이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에 휘둘린다면 오히려 눈 앞에 계신 하느님을 못 보게 됩니다.

 

정말 초능력이 존재한다면, 들국화가 노래한 것처럼, 미운 사람 손을 잡고 사랑노래 불러주고, 넓은 세상 볼 줄 알고 작은 풀잎 사랑하며, 빈주머니 걱정되도 사랑으로 채워주는, 이게 바로 초능력 아닐까요?

 

11. 깨달음은 단계적인가?

 

요가의 교과서인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단계적인 수련을 아주 중요시합니다. 처음 두 단계는 비폭력, 무소유 등 도덕적인 계율만 잘 지키다가, 그게 잘 되면 신체 훈련과 호흡훈련을 하고, 그 다음엔 명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런 단계적인 수련이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파탄잘리는 성욕을 탐하지 말라는 계율을 기초단계로 제시했는데, 요가 수련 20년을 한 사람이 갑자기 어떤 여자를 보고 성욕이 생긴 것을 보고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면서 20년 수행 말짱 도루묵이라고 절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고와 하느님의 동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착각입니다. 에고와 하느님은 이 몸이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함께 지냅니다. 그러므로 에고의 속성인 욕망의 발작이 죽을 때까지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임을 알고, 에고를 구경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에고가 완전히 소멸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혼동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에고의 완전한 소멸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나 부처님에게도 에고는 생물학적인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함께 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단계적인가요? 저는 돈오점수라는 말이 이 현상을 잘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오, 즉, 깨달음은 갑자기 나타나지만, 그 다음부터는 점수, 점차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는 깨달음은 어느날 갑자기 여러분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그 즉시 완벽한 평화가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 후로도 에고가 활동할 때마다 감정이 느껴질 것입니다. 깨달음은 그렇게 활동하는 에고를 구경하면서 자신을 더욱 더 잘 이해하는 것, 자신은 지금 날뛰는 생각이라는 에고가 아니라, 그 생각을 구경하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게 깨달음입니다.

 

 

12. 말로만? 글로만?

 

제가 이렇게 적어 놓으면 잘난척한다고, 정말 그렇게 사는지 두고 보자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제가 사는 걸 보면, “나는 아직도 못난 사람이야”라고 생각할 때마다 두려움에 휩싸이는 반면, “나는 하느님이야”라고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편해집니다. 하루 24시간 내내 깨어 있는 상태를 아직 저는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임을 믿고 하느님(현실)께 모든 것을 드리고, 하느님(현실)이 시키는 일만 할 때, 저는 평화와 감사와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께 중요한 것은 장용창이라는 저 이상한 사람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드린 말씀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시거나, 도저히 동의할 수 없으시다면, 그냥 지나가는 개가 짖었다고 생각하시고 무시하면 됩니다. 장용창이 옳은지 그른지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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